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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소득 공략법

포스트 코로나 시대, 전체주의 시대로의 회귀?

by 자유를 그리다 2021. 7. 22.

포스트 코로나 시대, 전체주의 시대로의 회귀될까?

 

오늘 주제는 최근 사회적 분위기로만 보자면, 조금 논란이 될 수 있는 얘기로도 보이니, 불편하신 분들은 뒤로 가기 바로 눌러주세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어쩌면 개인은 없고 집단만 있는 과거 전체주의로 회귀하는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얘기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근 일어나는 사회적인 현상을 보자면 이렇게 생각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코로나(covid 19) 팬더믹이 어느 정도 종식이 되더라도 정부가 개인을 통제하는, 이른바 통제 사회가 일상화되지 않을까 하고 많은 이들의 우려가 있기에 그렇다.

 

물론 여기에는 이런 의견에 반대하는 부류도 있다. "아니 무슨 소리! 코로나 팬더믹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종식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거야!" 하면서...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 코로나가 정말 종식 이란 게 있을까?  마치 감기 바이러스처럼 계속 인류와 함께 하지는 않을까? 사실 많은 전문가들이 올해 정도면 어느 정도 진정될 것으로도 예측했었다. 하지만 지금도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 나오고 있고, 일시적으로 확진자도 줄다가도 또다시 계속 느는 것이 반복되는 상황이다. 이렇게 확진자가 쉽게 줄지 않는다는 것은 이 바이러스가 자연발생적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바이러스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인류와 함께 영원히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될 확률이 더 커 보인다. 이 하나의 변화는 또 우리의 일생에도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보통이라고 생각되던 모든 상식을 리셋시키고 새로운 보통을 만든 것이다. 즉 뉴 노멀 시대로의 진입을 더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변화된 보통의 것들 중 내가 가장 궁금한 점이 하나가 있다. 바로 '대중들은 이 새로운 통제 시스템을 가볍게 인식 또는 적응하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받아들일까?' 하는 궁금증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좋든 싫든 어떤 형태로든 지금과 다르게 변화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여기에 대해 두 가지 관점으로 설명해 보겠다.

 

첫째, 개인이 체감하지 못하게 통제 환경에 노출된다.

또한 개인 각자는 이 변화를 제대로 인지 하지 못하고 간과할 확률 역시 크다. 한 예로 팬더믹 이후에도 비대면 산업이 주가 될 것이고(이미 꽤 많이 진행된 상태로 보인다.), 빅 테크 기업에서 제공하는 수많은 툴들은 개인의 정보를 이용해서 지능적으로 개인 입맛에 맞는 맞춤식 통제를 하고 있기에 더 그럴 것이다. 실제로 코로나19 초기 단계의 많은 국가에서 여러 형태의 이런 툴들을 이용해서 디지털 추적을 활용하기로 결정했었다. 당연히 코로나19 감염자의 이동을 막고 후속적인 격리 조치해서 부분 봉쇄 조치를 시행하기 위함이다. 이전의 전염 경로를 역추적하는 방식에서 이제는 실시간 이동 추적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사실 사생활 침해적인 부분이 충분히 논란이 되지만 한국을 포함한 홍콩 중국에서 이를 강제 시행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하나 발견된다."

 

한국을 포함한 이들 나라들은 동의 없이 모바일이나 신용카드 데이터를 통해 개인 이동 경로를 추적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이다. 거기서 더 들어가 한국의 경우는 비디오 감시 방법도 동원한 케이스다. 홍콩의 경우는 해외여행을 다녀오거나 한 격리자들에게 전자 팔찌 착용을 의무화도 했다. 상대적으로 통제가 약한 다른 나라들은 격리된 개인에 한해 위치를 추적하거나 규정을 위반할 경우에만 공개적으로 찾아낼 수 있게 휴대폰을 소지하는 절충안을 선택했다. 

 

그리고 각자 휴대폰에 설치된 앱들을 봐보자. 구글 유튜브, 카카오톡과 같은 모바일 앱 하나씩은 다 설치되어 있지 않나?

이 모바일 앱을 정상적으로 사용하려면 당연히 로그인을 하기 위해서라도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리고 빅 테크 기업에서 제공되는 이 앱들은 각자 어디 사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개인 정보를 넘어서 이제는 선호하는 취향까지도 들여다보며 개인의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간다. 만약 팬더믹처럼 공중 보건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며 정부 기관과 이들 기업들간의 동의만 있다면 그들은 언제든 개인의 정보를 들여다보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둘째, 고독과 책임이 싫은 부류의 큰 정부 선택

실제로 많은 국가들이 팬더믹으로 말미암아 작은 정부에서 다시 큰 정부로 다시 회귀하고 있는 것이 눈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 국가들이 이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개인주의나 자유성을 덜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국가들에서 이런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합법적으로 통제와 간섭이 일상화할 수 있다. 또한 개인주의나 개인의 자유성을 더 높게 평가하는 서구 국가들의 개인들도 팬더믹을 이유로 정부가 통제하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 아닐까?

 

반대로 말하면, 대중들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고 고독을 감내해야 하는 이 자유성에서 멀어지고 정부의 통제들에 세뇌되기 쉬운 환경에 노출된 것이다. 여기서 또 반대급부도 있다. 이 부류들은 평소 이 자유성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는 부류들로 이 패러다임을 꽤 환영하지 않을까?

 

"즉 고독과 책임이 싫은 부류들이다. 과거 역사에서 이 부류들은 이런 최적의 시스템인 전체주의를 선택했었다."

 

내가 우려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즉 개인은 없고 집단만 우선시 되는 과거 전체주의로의 회귀될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점이다. 물론 전체나 개인의 방역을 위해서는 이 방역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것은 여러모로 맞는 얘기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통계적으로 보면 통제를 잘 따르는 아시아 국가가 그렇지 않은 서구권 국가들보다 확진자에 대한 통제가 더 잘되는 것을 볼 수 있기에 그렇다. 특히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는 어떤 한 개인이 방역을 따르지 않고 다른 행동을 하게 되어 발각이라도 되면 집단의 몰매를 맞는 무서운 분위기가 깔려 있다. 개인들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분위기랄까? 특히 이 개인이 사회적으로 이름 꽤나 알려진 공인라면 더 그런 듯싶다. 최근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나훈아 씨의 콘서트가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얘기는 방역을 이유로 정부가 지나칠 지나칠 정도로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하는 부분 역시 많은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그러면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고독과 책임을 싫어하는 집단들은 팬더믹 이후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먼저 고독과 책임이 싫은 부류의 특징을 알아보자.

 

과거 20세기에 이 부류들은 전체주의를 선택했었다. 개인은 없고 전체만이 정의로 강요받던 시절, 그 결과 인류는 재앙과도 같은 광기와 폭력으로 얼룩진 암흑의 시기를 경험했었다. 먼저는 이탈리아를 필두로 파시즘이 전파되었고, 이후 또 다른 변종으로 민족 인종주의가 결합된 나치즘이 전파된다. 또 비슷한 시기에는 태어난 또 다른 변종인 공산주의가 있겠다.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정부가 개인을 통제하는,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가 기본으로 깔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지지하던 주요 계층들을 보면 소상공인, 장인이나 사무직 근로자로 이뤄진 하층 노동계급이나 중산층 계급들이  주류였다. 이들 부류에서 발견되는 성격은 어떨까? 과거 이 들의 성격에 대해 연구한 또 한 명의 학자가 있었다.

바로 독일의 저명한 사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다. 그는 이들 부류를 보고 '자유로부터의 도피하기 쉬운 성격'이라 칭했다. 즉 자유로부터 얻을 수 있는 고독감과 책임감을 기피하는 공통적인 성격을 발견했었다.

 

wikimedia, 에리히 프롬

 

이 부류는 의존과 종속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한 특징을 보였다.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로부터 의존 종속당하는 걸 선호한다. 또한 반대로 누군가를 의존시키고 복종시키는 것 또한 좋아한다. 즉 권위에 대한 복종 또는 스스로 권위를 갖고 누군가를 복종하기를 좋아하는 권위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이런 유형은 회사 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가 있다. 소위 자전거 발기하는 중간 관리자이다. 어느 회사나 자신보다 강한 상사에겐 굽신거리고 반대로 약한 부하 직원에겐 갑질 하는 그런 소유자들 한 명쯤 있지 않나? 에리히 프롬은 바로 이런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집단이 결국 파시즘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흔히 직장이라는 영역, 특히 국내 기업 문화만 보자면 여전히 전체주의적 성격이 강하다는 게 몸소 체험하고 있다. 어느 회사나 이런 권위주의적 갑질 문화가 있고 최근엔 언론을 통해서도 자주 드러나고 있다.

또한 회사를 떠나 더 크게 봐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개인적으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부 관료들의 행동만 봐도 이런 집단주의적 성격을 쉽게 볼 수 있는 요즘이다.

 

이제 개개인이 이 통제에 대해 스스로 의식해야 할 것이다. 자유의 소중함을 조금이라도 인지한다면 이런 통제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놓지 않고 과거의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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