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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feat.탐욕과 시간이라는 허상

by 자유를 그리다 2022. 8. 20.

싯다르타, 탐욕과 시간이라는 허상 - 책을 읽고 난 후 느낌

'싯다르타'는 헤르만 헤세가 1992년에 발표한 영성적 성장 소설이다. 평소에도 동양의 문화와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인도 카스트 제도의 1 계급에 속하는 성직자 계급의 아들인 주인공 싯다르타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전체 삶의 과정을 그려낸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는 이 싯다르타라는 소설을 쓰기 전 1년 반 동안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었고 정신분석 치료도 받았는데, 이때 그는 창작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심각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싯다르타를 쓰기 시작한 시기는 1919년부터였으나, 소설 속 '사문 생활'에 대한 자기 체험이 없는 것에 집필의 무의미함을 느껴, 결국 1년 반 동안 사문 생활을 하며 실제 자기 체험 기간을 거친 후에야 재집필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헤르만 헤세는 우울증 극복이란 힘든 시간과 자기 체험을 거친 3년간의 고난의 시간으로 스스로 담금질을 한 후에 출간된 책이 바로 지금 소개하는 '싯다르타'이다.

 


싯다르타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성직자 계급답게 깨달음을 얻고 세존 고타마처럼 완전체가 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과업의 완성에 대해 그의 절친인 고빈다를 비롯한 많은 사제들은 스스로가 아닌 외부의 힘에 의존해서 어떤 가르침을 얻으려고만 했다. 즉 세존 고타마처럼 깨달음을 얻게 된 선구자의 가르침처럼, 어떤 외부의 힘에 기대어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그 '가르침의 힘'에 어떤 의문을 느낀다. 본래 깨달음이란 것이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그는 사문들의 무리를 떠나 홀로 그 만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는 수행의 길에서 만난 부자 상인 카르스바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사색할 줄 압니다. 저는 기다릴 줄 압니다. 저는 단식할 줄 압니다."


이 대답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돈을 버는 기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황당한 답변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가 않았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자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세 가지 답변에는 숨겨진 공통적이 있다.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오롯이 본인 스스로가 자신을 통제할 줄 알아야만 가능한 힘이란 공통점이다.

 


이후 싯다르타는 부자 상인 카르스바미를 만나 돈에 대해 배우고 그 역시 부자가 된다. 그리고 당시 세련되고 매력적인 여성인 카마라를 만나서 사랑을 배우게 되어 주변의 평범한 속세의 사람들처럼 탐욕적이고 욕망을 채우는, 요즘으로 보면 자본주의 세상에서 세속의 성공적인 삶으로 채우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시간의 힘에 예속되는 것에 비례해서 탐욕의 크기도 점점 커져, 사문 생활 시절 그가 스스로가 비웃던 여느 부자들처럼 그 역시 부자의 옷차림으로 부자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처럼 아름다운 정원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후 탐욕의 시간은 흐르고 흘러 싯다르타는 40대 중년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제 그는 그의 겉모습만큼이나 세속에 찌들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어느 날, 문득 강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자신이 일군 모든 부와 연인인 카마라를 버리고 과거 자신을 태워준 뱃사공 바주데바와 함께 일하며 소박한 삶을 살게 되는데...

"자기 내면의 자아를 소멸시키고 시간이라는 허상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이 질문은 싯다르타가 사문 생활 때부터 사색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세존 고타마를 만나기 위한 순례길을 떠난 계기가 된 질문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헤르만 헤세 본인 스스로 '싯다르타'라는 인물을 그리며 그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며 했었던 질문은 아닐까? 헤르만 헷세 본인 역시 싯다르타 집필을 시작하기 전 극심한 우울증을 겪는 힘든 시간을 보냈었고, 집필을 하기 시작하고도 실제 사문 생활에 대한 지식이 없어 자기 체험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당시 자신이 처한 외부 환경 그리고 내면의 자아 사이에서의 갈등 모두 이 시간이라는 시간 선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즉 자기 내면의 자아의 소멸과 그가 처한 시간 선상에 존재하는 그만의 시간이라는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게 하는 도구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그렇게 그는 글쓰기란 도구를 이용해서 자신의 내면과 치열한 대화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완성체, 즉 지금 이 순간을 살며,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시간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고, 더불어 자아도 소멸되는 이치를 스스로 깨닫게 된 긍정하는 자,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 싯다르타를 그려내게 된 것은 아닐까?

싯다르타

싯다르타, 목차

제1부
바라문의 아들
사문들과 함께 지내다
고타마
깨달음

제2부
카말라
어린애 같은 사람들 곁에서
윤회
강가에서
뱃사공
아들

고빈다

작품 소개
해제 연보

 

싯다르타, 글 속으로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오, 친구,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앎뿐이며, 그것은 도처에 있고, 그것은 아트만이고, 그것은 나의 내면과 자네의 내면, 그리고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난 이렇게 믿기 시작하였네.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앎의 적은 없다고 말이야" -p35

"그런데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요? 당신이 배운 것,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지요?
저는 사색할 줄 압니다. 저는 기다릴 줄 압니다. 저는 단식할 줄 압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저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쓸모가 있지요? 예컨대 단식 같은 것 말인데요, 그게 무엇에 좋지요?
나으리, 그것은 아주 좋습니다. 단식은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요. 예컨대 싯다르타가 단식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당신한테서, 아니면 다른 데서라도 오늘 당장 아무 일자리 건 얻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배가 고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만 싯다르타는 이렇게 태연하게 기다릴 수 있으며, 초조해하지도 않고, 곤궁해하지도 않으며, 설령 굶주림에 오래 시달릴지라도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나으리, 단식이란 그런 데에 좋은 것입니다" -p97

"싯다르타가 한 번은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 비밀, 그러니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강물로부터 배웠습니까?"
바주데바의 얼굴이 밟은 미소로 가득 찼다.
"그래요, 싯다르타" 그는 말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p157

"싯다르타의 내면에서는, 도대체 지혜란 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추구해 온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이 서서히 꽃 피어났으며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그 무엇이라는 것은 바로 매 순간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 단일성의 사상을 생각할 수 있는, 그 단일성을 느끼고 빨아들일 수 있는 영혼의 준비 상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하나의 능력, 하나의 비밀스러운 기술에 다름 아니었다." -p191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그런데도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고빈다, 나는 이것을 몇 번이나 거듭하여 체험하였네. 그리고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현세와 영원 사이에, 번뇌와 행복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이라는 것도 하나의 착각인 셈이지"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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