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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와 혼돈, 더 나은 선택이란?

by 자유를 그리다 2020. 10. 6.
혼돈과 질서의 영역에서 가장 좋은 선택지란 무엇일까?
거기에 어떤 최상의 조합이란 것이 있는 걸까?

 

 

 

 

물론 그러한 최고의 완벽한 조합이란 것은 없다.

다만, "이 혼돈과 질서라는 이 두 영역에 가급적이면 동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가 가장 좋은 조합으로 보인다.

둘 중 어느 한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 나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nikkotations, 출처 Unsplash

누군가는 아니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x 소리 하냐고?라며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직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먼저 카오스의 세계란 어떤 것인가?

혼돈, 불확실성, 복잡성, 비선형, 무한, 인간이 바라보는 관점의 우주처럼 무지하며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것들에 비유되는 세계이다.

영역의 관점으로 보자면,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익숙한, 질서가 있는 세상 밖의 세상이다.

꽃길을 걷는 듯한 느낌의 자유라는 영역도 사실은 이 영역에 속한다.

물론 이것이 지나치면 당신이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다가와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는 사악한 뱀들도 도사리고 있다.

코스모스는 어떤 세계인가?

예측이 가능한 영역이다.

단순성, 선형, 유한, 질서, 통제 가능한 영역이 여기에 속한다.

컴퓨터처럼 느낌이나 감정이 전혀 없는, 사전에 창조자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어떤 정의들에 의해 동작하는 기계들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당신이 직장인이라면, 소속된 회사 역시도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이 영역에 가깝다.

By common.wikimedia.org

 

그럼 어느 영역에 속하는 게 좋은 것일까? 최상의 조합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사실 최상의 조합이란, 어떤 수치적으로 정확히 도출해 낼 수는 없다.

어디에서든 완벽한 질서도 완벽한 혼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의 인위적인 질서보다는 자연정화적인 혼돈의 영역이 지구라는 조그만 별 관점으로만 보자면,

좀 더 바람직해 보이는 게 내 생각이다.

어쨌든, 세상은 혼돈( 카오스, Caos)와 질서(코스모스, Cosmos)라는 서로 상반되는 성격의 두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이 '혼돈과 질서'는 요즘 미국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꽤 인기를 국가 중인 조던 피터슨 교수의 저서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부제로도 언급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가 이 상황들에 자주 놓이게 되는 순간들을 살펴보자.

사실 우리는 살아가며 매 순간에도 좋든 싫든 이 두 가지의 영역 중 하나에 대한 선택을 고민하게 된다.

© garri, 출처 Unsplash

먼저 우리가 매일 먹는 점심을 예로 들어 본다.

당신이 직장인이라면 자주 가는 단골 식당 하나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그 식당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이미 검증이 완료된 메뉴인 '부대찌개'란 것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질서를 선택한 것이다.

만약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며칠 전 출근길에 우연히 보게 된 중국집이 문득 생각나, 그 중국집의 짬뽕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혼돈의 영역을 선택한 것이다.

즉 우리는 일상에서 밥 먹는 순간까지도 혼돈과 질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침 출근 시간을 예로 들어보자.

매일 8시 즈음에 5분 배차 간격으로 도착하던 버스가 오늘은 웬일인지 10분이 넘어도 출발조차 하지 않고 있다.

당신은 질서에서 혼돈의 세계에 놓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직장인이라면, 당신이 몸담고 있는 그 회사라는 질서의 영역에 가까울 것이다.

그곳은 공익보다는 회사 오너와 투자자들을 위한 사적 이익을 궁극적인 목표로 만들어진 곳이다.

또한 조직 전체는 지분이 많은 오너나 투자자, 그리고 그들이 위임된 경영자가 만든 시스템과 매뉴얼로 각 세부 조직들이 질서 정연하게 통제되는 곳이다.

거기에 소속된 당신과 같은 직원은 회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안타깝게도 통제의 대상이자 회사의 재무제표 관점에서 보자면 비용이라는 질서의 영역에 놓이게 된다.

즉 개인의 자아 성취와 자유를 누리는 영역과는 사실상 거리가 먼 영역인 것이다.

만약 어떤 자유를 누리기 위해 당신이 퇴사를 선택하게 된다면 또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분명 그토록 당신이 원했던 통제 밖으로 나와 자유감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회사 밖의 세상의 질서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회사 밖에 세상은 회사처럼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 따위란 것이 없다. 즉 그곳은 혼돈의 영역으로, 그곳만의 룰이란 것이 또 존재한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이곳은 자본주의 이념의 사회이므로, 이 자본의 질서와 속성 따위를 알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질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대부분은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자본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질 못했다. 아니 이 질서를 만든 이들은 이 규칙을 알려주기를 꺼려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창조자인 신이 세상과 창조물들을 어떤 룰로 만들었는지를 우리 인간이 모르는 것처럼...

어쨌든 이 영역에서 가장 적응을 잘한 부류는 당연 자본가들이다.

그렇다. 당신이 자본주의의 룰을 알고 자본의 능력을 갖춘 조건이라면, 당신은 질서가 있는 회사 밖의 혼돈의 영역에서도 안정감을 가지고 적응을 잘 할 확률이 클 것이다.

하지만 이 룰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유를 얻기 위해 무작정 혼돈의 영역을 선택했다면?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자신이 불확실성의 시공간에 놓여 있는 현실을 깨닫게 될 확률 역시 커질 것이다.

결국 이 룰을 이해 못 한 그들 입장에서 이 영역이란, 태초에 여호아를 꾀었던 사악한 뱀들이 언제 어느 공간에서 당신을 공격할지 모르는 혼돈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럼 혼돈과 질서의 세계 중 어떤 영역이 더 좋은 영역일까?

물론 여기에도 정량적인 수치의 정답이란은 없어 보인다. 사실 이 지구라는 별은, 먼 우주에서 보자면 티끌처럼 작은 먼지처럼 느껴질 정도다.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코스모스의 저자인 '칼 세이건'은 이런 우주의 먼지와 같은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으로도 비유했다.

그러면 거대한 우주라는 공간 속의 작은 점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인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또한 이 작은 생명체가 우주의 모든 이치를 모두 안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오만한 판단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렇다. 이런 거대한 혼돈인지 질서인지조차 알 수 없는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어쩌면 신의 영역인 것이다.

성경의 모든 시작을 이야기하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을 보자.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 생략

창세기 1장

신은 이 최초의 암흑과도 같은 혼돈의 세상에 질서라는 것들을 만든다.

그리고 세상의 만물들을 창조하면서, 제일 마지막으로 흙으로 자신과 비슷한 모양새로 빚어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이다.

창세기 2장의 내용이다.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장

인간은 최초에 혼돈의 세상에서 질서라는 옷을 입었지만 실제론 무지하게 태어난 혼돈 그 자체인, 생명체였다.

그리고 이 작은 먼지의 세상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소위 안다는 것이 실존 하기나 한 걸까?

© mina6120, 출처 Pixabay

그러면 다시 혼돈과 질서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지라는 주제로 돌아가 보자.

결국 최선의 조합이란, 질서라는 온탕과 혼돈이라는 냉탕에 동시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내가 지켜야할 매뉴얼과 통제가 강한, 지금 몸담고 있는 회사의 조직 문화를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서의 영역인 그 곳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어떤 도전을 하고 싶을 때라면 냉탕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추위로 몸이 지쳐가면 잠시 질서라는 온탕에서 몸과 마음을 녹이며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적절히 조절하는 것 또한 최선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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