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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셋

쇼생크 탈출과 현대판 노예의 삶

by 자유를 그리다 2021. 3. 16.
'노예로 사는 삶이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스스로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라며 말이다.
- 미국의 극작가 리로이 존스(Leroi Jones)

 

오늘은 누군가 에게는 조금 불편하고 무거운 얘기 일수도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제 블로그 성격이 그러하니 저로선 어쩔 수가 없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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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차장님~ 예전 회사에서 맨날 야근 밥 먹듯 하곤 했는데 여기 사람들은 일을 너무 편하게 하는 거 같단 말입니다~"

"야! 김 대리~  그땐 다 그랬어~ 넌 S사 외주 안 해봤냐? 안 해봤으면 말을 말아~

구미 공단 아궁방이라고 들어봤냐? 내가 거기 휴대폰 외주 개발할 땐 말이야~ 월화수목금금금에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심지어 주말에 불려 다녔다~ 자다가도 벌떡 나가서 일했다~ 5분 대기조가 따로 없었단 말이지!"

 

 

By flickr

 

 

쇼생크 탈출, 이 영화는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1994년에 제작된 미국 영화다.

 

대략의 줄거리는 자신의 아내와 그녀의 정부의 살해범으로 누명을 쓴 주인공 앤디는 쇼생크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힌 후 겪는 스토리로 진행이 된다.

그는 감옥에서의 탈옥을 결심을 하며 탈옥을 위해 매일 조금씩 구멍을 뚫으며, 뚫어 놓은 구멍 위에 '리타 헤이워드'의 대형 포스트를 붙여 이를 숨기는데 사용한다.

이후 그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인 이 행위를 매일 조금씩 반복한다.

결국 20년이 지난 어느 한 날 그는 탈옥을 시도하고 성공하게 되어, 자유라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게 되는 내용이다.

 

사실 이 '쇼생크 탈출'은 워낙 잘 알려진 명작이자 내 인생 띵작이기도 하다.

 

내가 띵작으로 꼽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속 쇼생크라는 감옥이 현대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현실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쇼생크의 폐쇄적인 감옥 사회는, 몇 명의 교도관(관리자)들에 의해 전체주의적인 엄격한 규율로 통제가 되는 공동체 사회중 하나이다.

 

이즈음에서 곰곰히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 대다수 직장인들이 근무하는 회사라는 장소도 이 시스템과 닮아 있지 않나?

 

먼저 하드웨어적인 관점에서 봐 보자.

각자 앉아 있는 자리 배치도 한 가지만 봐도 조금 이해가 될 듯싶다.

 

 

By flickr

 

대부분의 관리자들은 꽤 높은 파티션에 둘러 쌓인 프라이빗한 모서리나 창가 가장자리 쪽에 등을 기대는 그림으로 배치가 된다.

그리고 일반 직원들은 어떤가? 이 관리자들이 잘 감시(?)할 수 있게끔 일렬로 자리가 배치된다. 물론 파티션도 아예 없거나 매우 낮게끔 설치된다.

그리고 상시 등 뒤로는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마치 매의 눈으로 쳐다보는 듯한 알수없는 에너지가 느껴지곤 한다.

이것은 쇼생크 감옥안에 배치된 그 시스템과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Wiki media, Mansfield Reformatory 미국 중서부 오하이주의 소년원, 실제 쇼생크 탈출 영화의 배경이 되었다.   

 

 

쇼생크 중앙의 높은 탑의 꼭대기에는 교도 소장이나 교도관들이 상시 감시하게 된다.

그래야 수많은 수감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제대로 감시할 수 있다. 반대로 수감자들은 교도관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감시자 입장에서는 이 불안감을 적극 이용할 수 있다. 반대로 간수들은 언제 어디서 감시 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그들에게 순응하게 된다.

 

다음은 소프트웨어적인 관점인, 근태 시스템 역시 이와 비슷하다.

이 시스템은 대다수의 직장이 도입하는 9시 출근 12시 점심, 6시 이후 퇴근 등 모든 것이 시간이라는 규율에 의해 통제된다.

사실 인체의 바이오리듬은 인간이 로봇이 아니기에 이런 시스템에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서구의 1차 산업 혁명 시기 이후로 어려서부터 이 훈련을 의무적으로 강요받은 결과 그렇게 적응이 된 것이다.

당시 1차 산업 혁명 시기에는 공장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라도 정시에 공장에 출근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인력들은 농경 사회 시스템에 적응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시 출근이라는 이 혁신적인 규율은 그들에게 잘 맞지 않는 옷이었다. 지금까지 그들 몸에 밴 시스템은 농경 사회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해가 뜨면 눈뜨고 해가 지면 자면 그만 이었다. 또 경작기 때는 바짝 일하고 추운 겨울에는 그동안 수확한 수확물들을 서로 나눠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어쩌면 자연의 생태적으로 보다면 이 시스템이 오히려 사람이 받아들이기가 더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 공장주들은 자신들의 명령에 순응하는 노동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니즈를 최초로 주장한 철학자가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이다.

 

By picryl, Johann Gottlieb Fichte

 

그는 '공교육의 의무화'라는 혁신적인 슬로건 아래 '의무 교육 시스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교육은 자아와 국가의 일치를 위하는 것, 국민이 국가에 애국심을 갖고 희생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 피히테의 독일 국민들에게 고함 중

 

결국 1819년, 프로이센에서 의무교육이 최초로 제정된다.

그리고 이 교육 제도를 1차 산업 혁명 시기의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던 영국에서 차용한다. 공장주들은 자신들의 말에 순응하는 훈련된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결과 또한 괜찮았던 것이다.

물론 이 훌륭한(?) 시스템은 입 소문으로 여러 나라에서 차용되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석유왕 록 펠러 역시 같은 목적으로 1903년 일반 교육위원회(GEB, General Education Board)를 설립하게 된다. 그의 보고서에는 평소 차분한 그의 성격 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GEB 설립의 목적을 드러냈었다.

 

 

By picryl, J.D.Rockefeller

 

"우리의 목표는 학교를 통해 사람들을 규칙에 순응하도록, 지배자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이고 가르치는 것이다. 관리 감독과 지시에 따라 생산적으로 일하는 시민을 양산하는 것이다. 권위를 의심하는 태도,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 이상을 알고 싶어 하는 태도는 꺾어버려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엘리트 지배 계급의 자녀들에게만 제공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그저 하루하루 즐기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하는, 숙련된 일꾼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교육이 그들에게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 록 펠러

 

이쯤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21세기 현재까지도 그들이 만든 이 시스템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국민) 초등학교 역시도 같은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의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왔다. 가만 생각해 보자. 초등학교에 가서 제일 처음 배우는 노래가 무엇인가? 바로 '학교종'이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의 가사는 역시 그런 목적에서 만들어진 노래이다.

그렇게 12년 동안 순응적으로 훈련을 잘 받은 순응적인 우리들은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비슷한 향이 나는 전체주의적인 시스템이 있는 저마다의 직장에서 사회의 한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 다수의 회사원들은 회사가 정해준 근무 시작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등의 규율을 따라야만 한다.

물론 이를 자주 어기거나, 아니면 자신이 왜 이런 산업혁명 시대에나 있을 법한 근태 시스템을 따라야 하냐면서 따진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해 보인다.

저마다의 근태 시스템에 의해 제제 또한 우리는 당연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이것은 팬더믹이 만연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김 부장들이 좀 더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 원격 근무나 유연 근무제를 못마땅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얘기가 너무 삼천포로 빠졌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 보자.

이렇듯 현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20, 30, 40 직장인들은 쇼생크 감옥과 같은 전체주의 적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시스템은 이미 꽤 오랜 시간 동안 암묵적으로 집단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무의식 세계를 지배해 온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꽤 오랜 세월 동안 무의식의 체면에 걸려 살아왔었다.

그리고 '월급 중독자'였던 나는 머리를 세게 때려 맞는 경험을 하면서 어느 날부터 쇼생크의 주인공 '앤디'와 처럼 큰 그림을 그리게 된 것뿐이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물론 이 영화 한 가지만의 이유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계기도 있었겠지만 이 영화 역시도 꽤 내 머리를 세게 한방 때리는 동기를 준 건 확실해 보인다.

다행히 지금은 결과적으로 봐도 이 의식적인 훈련 탓에 '월급 중독'에서는 꽤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최근 운도 많이 따른 덕분에 현재 기준으로 보자면 이 중독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기준에 꽤 많이 다가온 듯싶다.

 

 

By fickr

 

 

이렇게 내가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각자 장소는 다르지만 주인공 '앤디'가 쇼생크에서 했던 과정과도 상당히 비슷하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어떤 행위를 매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 행위란 사실 너무 간단하고 뻔하기까지 하다. 가장 기본은 저축이고 두 번째는 투자 나머지 한 가지는 사업이라기엔 조금 부끄럽지만 어쨌든 사업이다.

또한 나는 감옥에서의 앤디를 벤치마킹했다.

 

앤디 : 감옥에서는 자신의 계획을 숨긴 채 동료들의 앞잡이가 된다.
그리고 교도소장의 비위도 맞추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는 충성과 타협을 한다.

나 : 회사에서 나는 마음에는 내키지는 않지만 최대한 내 성격(?)을 드러내지 않고 어쨌든 그들과 잘 지낸다.
간지럽지만 관리자들과 내 보스의 비위를 맞추는 타협도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필요할 때는 보스의 편의에 서서 그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월급 중독, 직장 노예 탈출, 즉 앤디처럼 자유인이라는 목적을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여기서 예외 상황도 물론 있다.

쇼생크 탈출의 모범수 레드처럼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탈출 되어지는 것이다. 즉 모범수로 가석방될 수도 있는 것이다.

회사로 보자면 권고사직이든 명예퇴직이든 또는 이직 같은 것일 수 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회사 밖에서 자유를 누리며 그동안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면 된다. 반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 레드처럼 자유라는 현실이 또 다른 구속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익숙했던 감옥 생활을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게 될 것이다. 현실 사회에서도 수많은 퇴사자들이 익숙한 그 시스템과 결별하지 못하고 재 취업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찮게 보았을 듯싶다.

 

어떤가?

쇼생크 감옥과 이 현대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삶이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이지 않은가?

당신이 진정 자유를 원한다면, 이 세계를 아는 것부터 시작이다. 그리고 익숙한 것과 결별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 그토록 바라던 그 자유가 자신에겐 또 다른 구속 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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